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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수대밀수

특공대밀수

특징

  • 1954년 이후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항을 거점으로 한 소형밀수 전용선에 의한 대일 밀수
  • 밀수선은 최초에 소형 목조선→ 쾌속선(시속 30노트)→소형어선으로 변화
  • 일본정부기관(세관, 출입국관리소 등)은 일본국내법에 의거 합법성을 주장하여 변칙 무역선으로 인정
  • 선명, 선원명 등은 가명을 썼으며 선원수첩, 선박증서, 출입항 관계서류를 위조하여 행사(선내에는 세관, 해운국, 검역소 등의 용지, 공인 등을 비치
  • 출항시 외화 또는 탄피 등을 밀수출 하였으며 그 규모는 300만원
  • 일본의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세관은 밀수출품 또는 외화를 소지하지 않은 공선의 입항은 불허
  • 일몰후에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항을 출항하여 야간을 이용하여 남해안의 도서 또는 해안에 양륙하거나 해상에서 어선에 이적
대마도특공대밀수 루트

대마도특공대밀수 루트

  • 조직은 자금주, 해상운반책, 양륙책, 감시책, 육상운송책, 보관책, 판매책 등으로 구성된 집단적인 밀수 조직체로서 조직폭력배, 권력기관원이 개입
  • 어선을 가장하여 심야에 운행하므로 해상에 식별하여 검거하기 곤란
  •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항은 부산항 개항전에 대마도와의 왜관무역의 본거지
  • 특공대밀수 쾌속선

    특공대밀수 쾌속선

  • 대마도 이즈라항에 정박되어 있는 밀수선

    대마도 이즈라항에 정박되어 있는 밀수선

  • 이즈하라 밀무역중개상회

    이즈하라 밀무역중개상회

연표

  • 1954년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항 밀수기지로 등장
    • 6·25이후 휴전에 따라 소형선박에 의한 탄피, 잉곳, 해초 등의 대일밀수출 기지로 등장
  • 1956년 밀수출에서 밀수입으로 전환
    • 6·25전쟁에 인한 특수붐에 편승한 전후 일본산업의 재건으로 화장품류, 직물류 등 사치품을 미수입
  • 1959년 5월 대일통상 중단조치로 밀수출입이 급증, 최전성기
    • 연간 밀수선 1,300척, 밀수입액 약 10억원 추산. 日 이즈하라(嚴原)항에 밀무역 소개상사 山田商會외 22개 회사. 남해안의 부산, 마산, 여수, 목포세관 등에서는 남해안 일대를 몰래 활동하는 특공대 밀수선의 해상 봉쇄작전 전개
  • 1959년 11월 여수세관 감시선 안양호 해상감시중 침몰
    • 여수세관 감시선 안양호(36톤)가 욕지도 앞 해상에서 야간에 밀수선을 추격중 좌초 침몰(직원 1명 순직, 정보원 2명 사망)
  • 1961년 5월 16일 5·16이후 밀수 격감
    • 5·16직후 남해안 전해상을 봉쇄 강력한 단속 실시. 특공대 밀수조직을 색출하여 관련자를 전국적으로 대거 검거하고 군사재판 회부(소위 특별관세사범 사건). 한필국 처형으로 일 시적으로 근절 상태
  • 1962년 10월 목포세관직원 해상 감시중 순직
    • 1962년 10월 목포세관 감시정 돌산도 앞 해상에서 해상감시중 풍랑으로 직원 1명 순직
  • 1963년 12월 일반사면에 따른 출옥으로 특공대밀수 재대두
    • 민정이양에 따른 일반사면으로 복역중이던 밀수사범이 대거석방하자 출옥후 재조직하여 밀수를 자행
  • 1964년 쾌속밀수선 출현
    • 소형 선박(10톤급)에 탱크, 엔진 또는 그라마링 엔진 등을 설치한 시속 30노트 쾌속선으로 밀수 자행 ( 세관 감시선 독수리 시속 18노트)
  • 1965년 5월 권력기관 개입된 대규모 밀수사건 발생
    • 1965년 5월 부산항 월광카바레 옆 해안에서 수사기관이 개입된 대규모 강력 밀수사건 발생
  • 1965년 6월 전국 밀수사범 합동수사반 발족
    • 소위 월광카바레 밀수사건을 계기로 합동수사반 발족(초대 반장 서주연 대검검사) 특공대밀수 및 기타 강력 밀수사범단속을 목 적으로 군, 경, 검, 중정, 세관으로 편성한 합동수사반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남해안해상 밀수봉쇄작전 전개.
  • 1965년 8월 특공대 밀수선 영덕호를 격침
    • 1965년 8월 대마도 북단 해상에서 쾌속선 영덕호(7톤, 밀수품 700만원 상당 적재)를 충무출장소 감시선(송병순소장 지휘)이 기관총을 발사하여 격침, 선원 전원 구조
  • 1966년 밀수동태
    • 단속강화로 밀수범은 더욱 지능화 되었으며, 감시선의 노후화와 장비 부족으로 인해 밀수선을 발견하고도 검거하지 못하는 등 해상감시에 애로가 많아 해상에서의 검거는 불능상태(연간 밀수선 160척, 미화 328,388$ 밀수출(日 이즈하라(嚴原)세관 신고액)
  • 1967년 밀수동태
    • 연간 밀수선 190척, 미화 690,568$, 일화 13,288,370엔 밀수출(日 이즈하라(嚴原)세관 신고액)
  • 1968년 10월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항에서 특공대 밀수왕 이정기에 전향공작
    • 일본외무성 초청으로 부산세관 심리과장, 감정과장 등이 처음으로 대마도 이즈하라(嚴原)항을 공식방문하여 이정기등에 대하여 전향하도록 설득한 결과 이정기 등은 연내에 청산할 것을 약속하였으며, 이즈하라(嚴原)거주자를 정보원으로 포섭하여 정보망을 구축
  • 1968년 밀수동태
    • 연간 밀수선 150척, 미화 670,522$, 일화 29,864,000엔 밀수출 (日 이즈하라(嚴原)세관 신고액
  • 1968년 6월 부산세관 감시선 일본해상 보안청 소속 순시선에 피납, 한일외교문제로 비화
    • 日 이즈하라(嚴原)해상에서 밀수선 덕일호(금영호)를 감시선 독수리호가 검거하여 예인중 일본해상 보안청 소속 순시선에 피납되었다가 6시간만에 귀항하였으며 이 감시선 피납사건을 계기로 대마도 특공대 밀수가 비로소 국교정상화 이후 최초로 한일외교 문제로 등장
  • 1968년 8월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측은 대마도 밀수방지를 위한 가능한 조치를 취할 것을 공동 성명으로 채택
  • 1968년 12월 밀수왕 이정기, 오종옥, 김의경 등이 밀수결별성 명서 발표
    • 관계기관(주일 福岡총영사관 강철구 영사, 부산세관 심리과장)의 전향 설득에 따라 이정기 등이 밀수를 청산하고 福岡으로 이주
  • 1969년 1월 현선호 밀수사건을 끝으로 특공대 밀수에 종지부
    • 1968년 12월 최후로 日 이즈하라(嚴原)항에 입항한 현선호를 이정기 등이 공선으로 추방한 것을 부산세관에서 검거하였으며, 동 밀수선이 밀수입하려고 엄원세관 보세창고에 보관중인 화장품 등 시가 300만원 상당을 福岡총영사관 및 엄원세관과 교섭하여 한국외항선편으로 인수하여 몰수 처리, 현선호 밀수사건을 끝으로 15년간 남해안 일대를 누비며 세관감시망을 뚫고 자행하던 특공대 밀수는 근절됨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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